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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sler: Liebesleid (arr. Rachmaninoff)
허연, 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변심한 기억은 지금 다른 곳에서 한창 바쁘고
  망각은 문자도 보내지 않고

  어쨌든 최악이 아니었다는 듯
  문자 한 줄 할 줄 모르고

  내가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사연에 누가 울었는지
  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기억을 조각낸
  그 가위는 어떻게 왔을까
  실타래를 잘라버린 가위는 어떻게 내게 왔을까

  혈관이 따뜻해지는 순간
  나는 가위를 들고 또 잠이 들고

  잘려 나간 기억들은
  어떻게 의문 하나 없이 그곳에서 바쁠 수 있는지

  어떻게 잊을 수 있는 거지 장대비를 피하던 낡은 집들을 항구에 피신했던 목선들을⋯⋯ 나에게 닿기 위해 놀라울 만큼 멀리서 왔던 빛을

  잠만 들면 내 손에는 가위가 있고
  깨고 나면 베고니아의 목이 잘려 있고
  내 정원은 텅 비어 있고
  기억은 또 날 버리고
  기억은 기억들하고만 친구가 되어 있고

  망각은 문자도 보내지 않고



허연, 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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