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점토판
새의 발자국 같은 사랑을 새겼더란다.
변하지 않는다는 미망도, 줄지어 늘어선 서약도, 한번 베이면 천 년을 간다는 상처도 새의 발자국처럼 동풍에 밀려 떼를 지어 사라졌더란다.
진흙에 갇힌 사랑.
춘분과 추분을 잘못 계산한 사랑. 늙지 않는 벌을 받은 사랑. 죽어도 죽지 않는 쐐기문자로 남은 사랑. 섭씨 천 도쯤에서 구워진 사랑. 끔찍한 세월을 지나온 사랑.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에서 감히 사랑에 빠진 자들은 끔찍하게 일만 년을 살았더란다. 마르고 말라서 수메르의 노래가 됐더란다.
내가 사랑을 알기 전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사랑을 알기 전
수억 번의 일요일이 오기 전
그들은 사랑을 새겼더란다
새의 흔적 같은 사랑을
대홍수를 견딘 사랑
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일만 년 동안 말라붙은
쐐기 같은 사랑
허연, 점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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