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486
Kreisler: Liebesleid (arr. Rachmaninoff)
허연, 점토판

 

 

  새의 발자국 같은 사랑을 새겼더란다.

 

  변하지 않는다는 미망도, 줄지어 늘어선 서약도, 한번 베이면 천 년을 간다는 상처도 새의 발자국처럼 동풍에 밀려 떼를 지어 사라졌더란다.

 

  진흙에 갇힌 사랑.

  춘분과 추분을 잘못 계산한 사랑. 늙지 않는 벌을 받은 사랑. 죽어도 죽지 않는 쐐기문자로 남은 사랑. 섭씨 천 도쯤에서 구워진 사랑. 끔찍한 세월을 지나온 사랑.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에서 감히 사랑에 빠진 자들은 끔찍하게 일만 년을 살았더란다. 마르고 말라서 수메르의 노래가 됐더란다.

 

  내가 사랑을 알기 전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사랑을 알기 전

 

  수억 번의 일요일이 오기 전

  그들은 사랑을 새겼더란다

  새의 흔적 같은 사랑을

 

  대홍수를 견딘 사랑

  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일만 년 동안 말라붙은

  쐐기 같은 사랑

 

 

 

허연, 점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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