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486
Kreisler: Liebesleid (arr. Rachmaninoff)
서효인, 남극일기

 
 
-이곳에서의 추억을 기록하는 일은 금기였다 우리는 마지막 표정으로만 얼어야 한다

네가 준 마지막 초콜릿을 입에 넣는다. 볼 안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사이도 없이 초콜릿은 녹고 있다. 열대어에서 체체파리로, 체체파리에서 작은 열량으로 초콜릿은 없어진다. 사이좋게 녹는다. 숨을 내밀어 본다. 하얀 그림자를 남기며 얼음 속으로 사라진다. 내 혀와 입은 아직 따뜻하다. 그리고 나는 일기를 쓴다.
 
그제 우리는 허스키를 먹었다. 개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눈동자는 사납게 변하였지만 우리의 추위는 더 혹독하고 똑똑했다. 울음이 나오면서 동시에 얼었다. 그것에 바람이 닿으면 충직한 개 같은 추위가 바락바락 들러붙었다. 점퍼 안에서 제 맘껏 흔들리는 신체,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노트를 발견했다.

지구의 맨 밑바닥에 몸을 치댄다. 모든 신경을 뒤로 집중하면 얼음의 열기가 느껴진다. 너의 기억이라고 해두자. 잉크를 내보내는 펜, 피 흘리는 코처럼 성급한 동작이다. 이곳에 비해 나는 너무나 뜨거웠고, 이제 단순한 명제처럼 녹을 것이다. 손가락을 접었다. 편다. 흰 종이 위에 손목을 올려 본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단단한 노트를 두들기자 동양의 것으로 보이는 문자들이 이끼처럼 뒹군다. 글자들의 단련된 질서에서 점심 식사로 개를 먹는다는 먼 나라가 떠올랐다. 어제부터 동료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고,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아마 얼어 버린 것 같다. 고향의 말과 비슷한 발음을 중얼거린다. 노트를 읽는다. 이곳은 광활하며, 이끼뿐이다.

얼음 속에서 너의 얼굴을 본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와 함께 천천히 녹고 싶다. 그리고 적는다. 군락을 이룬 이끼처럼 촘촘한 얼굴들의 얼음. 네가 지었던 모든 표정이 이곳에 모여 있다. 나는 주인에게 잡아먹히는 개가 되더라도, 이 순간이 초콜릿 같을 거야, 라고 네게 말하고 싶다. 일기를 덮는다.
 
노트를 떨어뜨렸다. 하염없이 길게 미끄러지는 네모난 물체를 따라 이끼들이 갈라진다. 나는 지구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이다. 극을 향해 달려가는 무심한 병자다. 다시 노트를 집어 든다. 허스키가 꼬리를 흔들며 나아갈 곳을 쳐다본다. 동료들이 멈춘 나침반을 가리키며 환호한다. 이곳에서 영원토록, 호주머니에서 펜을 꺼낸다. 그만 여기서 얼고 싶다. 
 
 
 
서효인, 남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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